불교에 노출되어본 사람들은 자아는 공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입니다. 우선,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 불자들도 여러분들처럼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장합니다. 적어도 우리 대부분은 꼬집었을 때 고통을 느끼고, 흐느껴 울 만한 이야기를 들을 때 눈가가 젖고, 길고 추운 겨울을 어마어마하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아를 비우는 것을 옹호합니까? 공은 어떨까요? 불교는 또한 공의 법문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은, 사물은 조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허하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조건이 흩어지면 공으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은 땅(살과 단단한 부분), 바람(호흡), 불(체온) 그리고 물(체액), 이렇게 4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 그리고 그들과의 전생 인연 등과 같은 다양한 조건을 통해 몸을 얻습니다. 다양한 조건들이 그들의 여정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몸을 버리고 사라져야 합니다. 모든 것의 본성은 이렇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향해 가차없이 진화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든 것을 충분히 오래 관찰하면 결국 모든 것은 공으로 되돌아갑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공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 점을 명확히 하고, 만약 우리의 계획 시야가 충분히 길다면, 우리는 이 공개념을 고려해야 하고 자동차, 집, 음식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많은 애착을 줄이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확실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덜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즉, 머리가 더 맑아짐), 더 편안해지고(즉, 걱정이 더 적음), 더 행복해집니다(즉, 만족감을 알게 됨). 자아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그 교양 있는 사람은 우리가 자아(다소 일반적인 태도) 라고 인식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의 몸이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의식과 영혼은 어떨까요? 우리는 물리적인 신체 이상이고, 확실히 시체보다 더 생기는 있기 때문에 우리 존재의 무형적인 측면이 꽤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아에 대해 다소 불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해 보죠. 우리가 아는 한, 우리는 우리 두뇌의 작용과 능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예, 뭐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난 내 스스로에게 완벽하게 만족해." 왜? "난 좋은 직업이 있고, 남편을 사랑하고, 우리 애들은 예의도 바르고, 좋은 가정생활을 하고 있잖아." 자, 바로 이 순간, 자아는 만족합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가요? 가족을 갖기 전에도 이랬습니까? 이게 지속될 수 있다는 보장이 무엇입니까? 불교에서, 행복한 자아는 조건이 변했을 때 마음이 변하고 불행해지는 자아와 동일하다고 지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것들은 인생의 부침이라고 여러분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린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에고의 반응에 관한 것이라구요. 우리(우리의 에고)가 더 많은 애착을 가질수록 더 많은 것들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상황은 매정하게도 나빠지고 우리의 일시적인 만족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에고에 대한 이 모호한 개념 위에,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즉, 젊음을 지나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죽음)에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요컨대 우리의 이 자아라는 것은 외적 조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불자들에게, 이러한 모든 즉흥적인 선회와 변칙들을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아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아 비우기 자아는 어떻게 비울 수 있습니까? 아니요, 우리는 여러분에게 살을 빼거나 소중한 장기를 기증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의 애착을 끊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애착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합니다. 현실을 직시해 봅시다: 우리 대부분은 선택적으로 기억을 유지합니다. 우리는 놀이공원에서 기구를 탔던 2분간의 경험에 대해 과장하거나 몽상해보길 선호합니다. 우리는 기구를 타기 전에 오래 기다렸던 것에 대해선 편하게도 잊기로 선택합니다. 또한, 재미를 다 보고 나면 우리가 느낀 ‘김빠짐’을 재빨리 카펫 아래로 쓸어 넣어버립니다(덮어 모른 척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다양한 집착들은 우리를 산만하게 하고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그러한 집착이 없다면 우리는 삼매(즉, 정신 집중)에 들어가 삼매의 안락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수행자들은 점차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삼매(즉, 집중력의 증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높은 수준의 삼매 중 하나는 자아가 기능을 멈추고 안락이 불가사의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자아를 비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을 더 행복하게 만듭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영어 원문: https://www.chanpureland.org/dharma-blog/on-emptying-the-self ] #영화선사 #Monthly_Dharma_Talk #참선 #정토 #Chan #Meditation #Pureland #BLI #MasterYongHua #아미타부처님 #Amituofo #자아를_비우는_것에_대해 #On_Emptying_the_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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